Citta Lenta - Slow City

패스트푸드·백화점·대형할인점 ‘3無’
주간동아 | 기사입력 2007-09-19 09:24



이탈리아 슬로시티 오르비에토 전경.

[주간동아]

1999년 10월15일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오르비에토에 그레베 인 키안티, 브라, 포시타노 등 슬로푸드(slow food) 운동을 벌이고 있는 네 도시의 시장이 모여 ‘슬로시티’를 선언했다.

“우리는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흥미를 갖는 도시, 훌륭한 공공장소와 극장 가게 카페 여관 사적, 그리고 풍광이 훼손되지 않은 도시, 전통 장인의 기술이 살아 있고 현지의 제철 농산물을 활용할 수 있는 도시, 건강한 음식·건강한 생활·즐거운 삶이 공동체의 중심이 되는 도시를 추구한다.”(슬로시티 선언)

마을 중심가엔 차량통행 금지, 네온사인도 규제

이 선언 이후 2002년 그레베 인 키안티가 처음으로 슬로시티를 선포했다. 그레베 인 키안티는 피렌체에서 자동차로 1시간 정도 떨어진 인구 1만4000명의 소도시. 해발 500~700m의 산간지방인 이곳은 계단식 경작법으로 포도원과 올리브를 재배하는 이탈리아의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그레베 인 키안티의 파올로 사투르니니 시장은 슬로푸드 운동을 해오던 중 단순히 먹을거리만을 분리해 생각하기보다 삶의 방식을 바꾸고 그에 맞는 환경 조성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한다. 이는 시대를 거꾸로 가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사투르니니 시장은 먼저 전통이 살아 있는 도시, 청량음료나 인스턴트식품 자판기와 패스트푸드점 같은 빠른 삶을 상징하는 음식이 없는 도시, 대형할인점과 백화점 등 대규모 자본력이 유입되지 않는 도시를 만들고자 했다.

당연히 주민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일정 구역에서의 주차나 차량 진입 금지, 전통 방식을 강요하는 농축산물 재배·사육 정책은 지역민의 반발을 샀으며, 강렬한 항의소동과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사투르니니 시장은 “‘슬로’라는 것은 불편함이 아니라 자연을 이해하고 순리를 기다릴 줄 아는 것”임을 강조했으며, 때마침 유럽 전역에 광우병 파동이 일어 많은 사람들이 그의 뜻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를 계기로 외지인의 부동산 거래가 원천 봉쇄되면서 지역 소상공인이 대대로 가업을 이을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마을 어디에서든 지역민이 경영하는 상점에서 신선한 식품을 살 수 있게 됐으며, 식당은 인근에서 재배된 식재료로 음식을 만들었다. 마을 중앙광장에 깔린 벽돌과 쓰레기통 토기까지도 전통적 방식으로 제작했다. 이에 따라 지역 내 상업적 이익은 고스란히 지역경제로 환원될 수 있었다.

이 마을에는 1000년째 대를 이어 올리브 과수원을 가꿔온 농부, 계단식 경작법을 30년간 실험해 포도농사에 성공한 농부, 그림을 그리는 농부, 시인이면서 30년간 정육점을 운영해온 정육점 주인 등 다양한 명사(celebrity)들이 산다. 정육점 주인은 정육점 앞에 마련된 무대에서 모노드라마를 펼치기도 한다. 이런 스타들과 그들이 일궈놓은 마을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마을 여기저기를 걸어다니는 진풍경도 볼 수 있다.

그레베 인 키안티는 슬로시티 운동이 확산되면서 지명도가 높아져 관광객 증대, 마을 인구 증가, 소득 수준 향상, 완전 고용, 지역민들의 애향심 고취 등의 효과를 보고 있다.

그레베 인 키안티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오르비에토는 900년 된 성벽에 둘러싸인 고풍스러운 마을로, 연간 관광객이 200만명이 넘을 만큼 국제적 명성을 자랑하는 곳이다. 이런 도시가 관광객 유치, 첨단화 등의 편리함을 버리고 ‘인간다운 마을’을 추구하겠다며 슬로시티를 선언했다. 마을 건물과 도로가 수백 년 전 우마차가 다니던 시절 그대로이기 때문에 늘어나는 자동차가 큰 위협이 됐다. 이에 따라 시에서는 마을 중심가로 자동차가 진입하지 못하도록 했고, 번화가에도 번쩍이는 네온사인을 달 수 없게 했다.


그레베 인 키안티의 유명 정육점과 주택을 개조한 고급 호텔(왼쪽부터).

“인구 유입 늘어 지역 고유성 침해” 비판적 시각도

브라에서도 도심지 역사유적지에는 자동차가 접근할 수 없다. 그리고 수제품이나 가공식품 등을 다루는 소규모 가족경영 가게들이 최고 입지를 선점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시청은 도시 미관을 위한 건물 리노베이션을 보조하기도 한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지역 주민이 재배한 유기농 과일과 채소를 먹는다. 또 지역주민의 과로를 막기 위해 브라의 모든 소규모 음식점들은 목요일과 일요일에 문을 닫는다. 단, 시청은 시민들이 느긋하게 공공업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토요일 아침 근무를 한다.

브라의 부시장 브루나 시빌레는 “우리는 새로운 분위기, 새로운 삶의 방식을 ‘천천히’ 만들어나가고 있다. 세계화의 물결을 헤쳐나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런 와중에도 우리는 느림의 철학이 도시 행정을 펴는 최상의 방법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레베 인 키안티, 오르비에토, 브라 등 슬로시티를 선언한 도시들이 인간다운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치타슬로(슬로시티) 연맹’은 전 세계적으로 러브콜을 받고 있다. 2007년 현재 슬로시티 선언을 한 도시는 독일 레베스가르텐, 영국 토트네스 등 10개국 93개 도시(지역). 치타슬로한국, 치타슬로영국(cittaslow.org.uk), 치타슬로노르웨이(cittaslow.no), 치타슬로독일(cittaslow.info) 등 여러 나라에서 연맹지부가 생겨나 슬로푸드 못지않은 관심을 끌고 있다.

한편 슬로시티 운동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없지 않다. 그레베 인 키안티의 경우 유명세를 탄 이후 다른 지역에서의 인구 유입과 관광객 증가가 지역 고유성을 침해하고 각종 공해와 문화충돌을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슬로시티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아 물질본능에서 자연·인간본능으로 회귀하고, 너(관광객)와 나(지역주민), 나아가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21세기 문화 코드라 할 수 있다. 시빌레 부시장은 “슬로시티 운동이 모든 것을 멈추고 시간을 거꾸로 돌리자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박물관에 박제되고 싶지 않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멋진 삶을 촉진할 수 있는 현대와 전통의 조화다”라고 말했다.


장희정 신라대 국제관광경영학부 교수,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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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삶에서 행복찾기 ‘슬로시티’ 꿈꾸는 마을들
주간동아 | 기사입력 2007-09-19 09:24



증도 우전해수욕장(작은 사진)과 태평염전.

[주간동아]

전남 신안 앞바다에 떠 있는 인구 2179명의 증도는 ‘느림’의 섬이다. 한가로운 선착장에서 차를 타고 10분 정도 가면 드넓게 펼쳐진 태평염전이 이방인을 반긴다. 단일 염전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462만㎡)인 이곳에서는 태양과 바람과 바닷물이 ‘느리게’(25일간) 천일염을 만들어낸다. 일반 정제염이 수시간 만에 완성되는 것에 비하면 말 그대로 슬로푸드(slow food)다. 이 섬에서는 또 순박한 사람들의 인심과 맑은 공기, 바다와 역사가 만난다. 30여 년 전 이곳 앞바다는 700년간 간직하고 있던 해저 유물을 대거 토해냈다. 게다가 고운 모래의 해수욕장이 30여 개, 유럽형 리조트 단지와 고즈넉한 해송숲까지….

10개국 93개 도시 ‘슬로시티’ 가입 … 아시아엔 아직 없어

이곳에서라면 이방인도 도시화와 경쟁, 비인간화를 걱정하지 않으면서 피에르 쌍소가 말한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은 삶의 방식’인 느림을 맛볼 수 있을 듯하다.

요즘 증도를 포함해 전남 장흥군 우산슬로월드지구, 완도군 청산도, 담양군 창평면 일대를 ‘슬로시티’(slow city·이탈리아어로 citta lenta)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이들 지역의 요청으로 9월7일부터 이탈리아 슬로시티 국제연맹에서 로베르토 안젤루치 회장 등 대표단이 방한해 현지실사를 진행했다. 국제연맹의 가입인증 여부는 올해 11월 결정된다.

‘슬로시티’란 전통 보존, 지역민 중심, 생태주의 등 느림의 철학을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도시(지역 자치단체, 커뮤니티)를 의미한다. 이는 1986년 미국형 효율지상주의와 패스트푸드에 기초한 패스트 라이프에 반대해 시작된 슬로푸드 운동의 정신을 지역 차원으로 확대한 개념이다.

1999년 슬로시티 운동이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이후 전 세계 10개국 93개 도시(47쪽 기사 참조)가 슬로시티 국제연맹에 가입했으며, 이 도시들은 속도 지향적 삶에 반기를 들고 있다. 이 운동을 추진한 대부분의 도시들은 생태, 환경, 맛, 전통을 기반으로 하는 관광도시들로, 고용률 100%라는 경제적 효율성도 달성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슬로시티’가 되려면 국제연맹에서 제시하는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무엇보다 인간적인 삶이 가능한 적정 인구(5만명)를 넘어서지 않으면서 전통 산업, 슬로푸드와 아름다운 경관을 갖춰야 하며, 대기업 자본이 없어야 한다. 또 세계적 네트워크를 가질 수 있는 보편적 상품이나 문화 등이 있어야 한다(상자기사 참조).

그렇다면 슬로시티 가입을 추진하고 있는 국내 지방자치단체(이하 지자체)들의 상황은 어떨까. 슬로시티 국제연맹의 실사를 계기로 각 지역의 현황을 짚어봤다.

신안군 증도


슬로시티 인증을 추진 중인 완도군 청산도(사진 위), 장흥군 우산슬로월드지구, 담양군 창평 한옥마을(왼쪽부터).

해수욕장과 염전 등 천혜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는 증도는 지난해부터 슬로시티 가입을 준비해왔다. 올해 6월 말에는 섬 전체를 자전거섬으로 선포하고 섬 내에 자전거 350대를 비치해 누구든지 탈 수 있도록 했다. 대체에너지 개발을 위해 800kW급 태양광 발전소(12월 준공 예정)를 건설 중이며, 에너지 소모가 적은 친환경 교통시스템 구축 방안도 모색하고 있다.

태평염전은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석조소금창고를 국내 최초의 소금박물관으로 활용하고, 된장 간장 젓갈 등 천일염을 바탕으로 한 전통음식 개발과 환경친화적 숙박시설 건설, 소금을 활용한 힐링센터와 염생식물원 조성 등 증도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다양한 투자를 계획 중이다. 박우량 신안군수는 “도민들에게 느리게 사는 삶도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알리고 싶다. 도민의 의견을 수렴해 시간 자체를 1시간 정도 늦게 가게 하는 방식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완도군 청산도

완도군은 2006년 문화관광부의 ‘가고 싶은 섬’ 프로젝트 시범사업(사업비 174억원) 지역으로 선정된 청산도를 슬로시티와 묶어 개발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다. 청산도는 인구 2508명에 청동기시대 지석묘, 당리 민속가옥, 해녀 등 섬 특유의 민속 문화와 독특한 농경·어로 문화가 풍부하게 살아 있는 곳이다. 특히 이곳은 경관이 아름다워 영화 ‘서편제’와 드라마 ‘봄의 왈츠’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군 관계자는 “아름다운 휴식과 특별한 체험이라는 청산도의 발전 방향이 슬로시티와 꼭 들어맞는다. 슬로시티 인증을 통해 또 하나의 브랜드로 관광사업을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청산도의 경우 도민들이 특히 적극적이다. 지난 5월 군이 슬로시티 가입 추진 내용을 놓고 ‘가고 싶은 섬 추진위원회’ 소속 주민들과 의견을 교환했을 때 적극적으로 환영 의사를 표현했다.

장흥군 장평면 우산리·유치면


‘느린 세상, 건강한 장흥’을 군정 목표로 내세우고 있는 장흥군은 2006년 행정자치부 주최 ‘살기 좋은 지역 만들기’에 선정된 우산리 ‘우산슬로월드지구’와 유치면 일대를 슬로시티로 신청했다. 이 지역 1286명 면민은 표고버섯을 대표 지역농산물 브랜드로 키워가고 있으며, 표고버섯을 산림청의 지리적 표시제 제2호로 등록했다. 버려지는 표고 자목을 활용해 장수풍뎅이를 사육하는 장수풍뎅이마을(유치면 반월리)에도 도시 관광객이 부쩍 늘었다. 전통 방식의 장담그기, 청국장 제조, 유기농 수산업 확산, 지렁이 생태학교 운영 등도 슬로시티 인증을 위해 추진해온 사업이다. 군 관계자는 “장흥은 11만4000명이던 군 인구가 20년 사이에 4만3800명으로 줄었고, 노령화로 국가 및 지방 개발계획에서 늘 소외됐다. 하지만 요즘은 자연환경과 공동체 문화가 살아 있는 지역으로 재인식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담양군 창평면

담양군은 18채의 전통가옥이 모여 있는 창평면 유천리 일대가 슬로시티로 지정되길 기대하고 있다. 면민은 모두 4200여 명. 이곳은 전통적으로 죽부인 대자리 등 죽세공품과 죽염된장, 한과, 쌀엿 등 전통음식을 생산해왔다. 또 이곳은 전국 유일의 한국대나무박물관, 전국 유일의 죽림욕장인 죽녹원 등이 있어 자연환경과 전통문화가 살아 있는 웰빙형 관광명소로 급부상 중이다. 군 관계자는 “슬로시티 가입으로 개발되지 않은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여유 있는 삶을 되찾을 수 있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슬로시티 가입을 준비하는 지자체 가운데는 준비 기간이 짧고 주민 홍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곳도 있지만, 각 지자체들은 가입이 무난하리라 기대한다. 또 한국슬로시티 유치위원회에서는 적어도 3곳 정도는 가입이 가능하리라 내다보고 있다. 태평염전 손일선 대표도 “슬로시티의 창시자 사투르니니가 지난해 증도 염전을 둘러보며 ‘신이 키스한 곳’이라고 극찬하면서,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 가입을 위해 협력하겠다고 말했다”며 가입을 낙관했다.

물론 슬로시티 지정이 전부는 아니다. 유치위원인 장희정 신라대 교수는 “지자체장의 임기가 바뀌어도 정책의 연속성이 보장돼야 하고, 관광상품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콘텐츠를 개발해야 한다. 유통 경로, 일정 수준의 품질관리를 위한 민간자문기구도 필요하며, 국제 교류와 모니터링을 위한 정부의 지원제도도 갖춰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슬로시티 가입을 계기로 농어촌과 중소도시의 새로운 발전 모델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인가. 슬로시티 한국유치위원장 손대현 한양대 교수는 “대도시화, 한미 FTA 등의 영향으로 농촌산업이 수세에 몰려 있는 국내 현실에서 슬로시티는 세계적 네트워크 가입을 통한 농어촌 지역의 국제적 브랜드화, 전통과 자연생태 관광상품화, 중소도시의 경제 자립 모델 제시 등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창시자인 사투르니니는 “이탈리아의 올리브, 와인 생산지를 중심으로 시작된 슬로시티 운동이 이제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 지역으로도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며, 슬로시티는 향후 인구 5만 이하 중소도시의 세계적 발전 모델로 주목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by Anton_ | 2007/09/19 23:50 | la_société * | 트랙백